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수업에서 듣는 말소리 만큼이나 순수하신 것 같습니다.
전에 고갱의 그림에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답변을 그렇게 상세하게 하실 지 몰랐습니다.
괜한 질문을 드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그림으로 들어가서, 강조하시는 흔들리는 윤곽선을 의도적으로 표현하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나이프 사용도 익숙하지 않고, 덧칠하다가 보니 색채도 내 맘대로가 되더군요.
그리고 '밝으면서도 견고하다.'는 말의 뜻이 아직 명확히 와 닿지 않습니다.
이건 누구에게 설명을 들어서 알 수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느껴야할 것 같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세잔의 기울어진 붓터치였습니다. 그래서 좀 엉뚱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세잔의 붓터치는 왜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사선일까? 그저 오른손 잡이여서 그리기 편해서일까? 아니면 빛이 왼쪽에서 들어오기 때문일까? 왼쪽으로 기울어지면 어떤 느낌이 날까? 만약 빛이 오른쪽에서 들어온다면? 그때는 그림의 구도도 바꿔야할까?'
심지어 지구의 자전축이 우측(동쪽)으로 23.5도 기울어져 있으니 사물의 본질을 중요시하는 세잔이 그랬을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상상도 해봤네요. 또한 같은 이유로 그림을 보는 이에게 가장 편안한 각도일 거라는 상상도. ㅎㅎ
혹시 이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있나요? 특별히 대답해주실 말이 없으면 안 해주셔도 됩니다.
저는 의사라는 직업 외에 글(수필)을 조금 쓰고 있습니다.
제 자랑 같지만 어느 수필문학상에서 대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 글에 대한 문학평론가의 심사평을 보고 '꿈 보다는 해몽'이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보통 글을 쓸 때 한 문장, 한 문장 무수히 곱씹고 고쳐서 진저리가 날 정도가 돼야 끝내지만, 작가 스스로 느끼는 경중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제가 무심결에 썼던 문구를 끄집어 내서 다른 것과 연결지어 좋게 평가하더군요. 제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방향으로.
선생님께서 수업 중에 하신 말들이 생각납니다. 세잔의 붓터치, 형태, 색깔, 구도는 모두 의도적이고 그래서 모사하기 어렵다는...
물론 세잔이 그것들 하나, 하나에 심사숙고하면서 어떤 의미를 담았겠지요.
하지만 그도 사람인 이상, 모든 붓질에 동일한 심혈을 기울일 수는 없었을 테고,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오랫동안 내면에 숙성되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술혼이며, 진정한 예술이라는 생각도.
수십 년동안 미술을 해오신 분에게 이제 배운지 6개월 된 제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군요.
세잔이라는 천재 화가에게 저의 경우를 예를 든다는게 가당치 않기도 하고요.
제가 없는 시간을 쪼개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제 글에 직접 삽화를 그려보고 싶다는 거창하지만 소박한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선생님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그 디딤돌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다음 그림으로 또 뵙겠습니다.